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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신앙생활/신학자료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기독교조직신학개론(다니엘L. 밀리오리) 요약-제4장 삼위일체 하나님

by jinaou83 2020. 8. 16.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기독교 조직신학개론

다니엘L. 밀리오리 지음 | 신옥수, 백충현 옮김

(새물결플러스)

 

 

4 삼위일체 하나님

 

 

현대 신학에서 신론의 문제

하나님은 누구인가? 성경적, 고전적 신학 전통의 친숙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믿는 기독교적 고백은 항상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된다. 삼위일체론은 현대신학에서 직면하는 가장 독특하고 기독교적 이해라 있는 영역에서 가장 절박하고 난해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문제이다.

 

삼위일체론의 성경적 뿌리

삼위일체론의 성경적 기초는 단순히 몇몇 증거 본문들에서 찾을 수는 없다. 삼위일체론의 기초는 성경 전체의 증언에 스며 있는 삼위일체적 유형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만 계심을 확증한다. 삼위일체 신앙은 이런 성경적 증언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을 지지한다. 성경의 유일신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신약은 동시에, 하나님의 실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새롭게 하는 성령 안에서 드러나며, 성자와 성령의 나타남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될 없음을 증언한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성부 일컬어지는 분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성자라고 불리는 존재의 희생적 사랑 안에서 인간됨을 통해 실행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성령 분에 의해 기독교적 속에 현존하며 활력적인 실재가 된다.

 

삼위일체적 사고는 항상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토대로 믿는다.

 

경륜적 삼위일체론(economic Trinity) : 구원의 경륜에 드러난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이면서 삼중적인 작용

내재적 삼위일체론(immanent Trinity) :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위격들의 영원한 구별

 

삼위일체론이 사변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이론의 토대와 한계를 성경 이야기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계시가 하나님의 신비를 전부 밝혔다고 자신해서도 안된다. 올바른 삼위일체 신학은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의 시작 이후로 그리스도인이 경험했던 계시와 구원의 역사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한다. 삼위일체 신학의 논리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된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경륜적 삼위일체), 그와 같은 삼중적 사랑이 하나님의 존재의 심연 속에서 가지는 궁극적인 근거를 향해 나아간다(내재적 삼위일체).

 

고전적 삼위일체론

여러 세기를 거치며 교회는 명확한 삼위일체론을 정식화했다. 니케아 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교리의 핵심은 하나님을하나의 본질과 구별된 위격들 정리한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 신앙의 왜곡된 형태들에 반대하는 지점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종속론 :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들 자체가 신성의 서열이나 질서를 의미한다. 영원한 성부와 열등한 성자 성령이 존재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있는가?

양태론 :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단지 하나님의 가면들이다. 하나님은 가장 내적인 존재를 필연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모습을 확신할 있는가?

삼신론 :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분리되고 독립적인 신성이다. -> 이것은 여러 성경 본문과 모순된다. 예배의 대상이 어떻게 다른 신이 있는가?

 

그런데 고전적 삼위일체론 정식의 개념화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 무엇인가? 삼위일체론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역사하고 있으며, 이런 사랑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변덕스럽거나 일시적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으며 창조적 희생적 사랑이며, 남을 지배하지 않고 타인과 함께 삶을 공유하며 섬기도록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온전한 확신과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예배하고 섬길 있는 분이다.

 

신론의 왜곡

삼위일체 신앙이 붕괴되면 다양한 비성경적 일신론이 나타난다.

  1. 창조자 일신론
    삼위일체의 첫번째 위격의 일신론이다. 하나님을 우주의 제일 원리로, 만물의 기원으로 간주하지만 죄에 대한 인식이 없으며, 용서와 회개, 삶의 변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2. 구원자 일신론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의 일신론이다. 예수를 영웅으로 보든지 종교적 의식의 중심인물로 간주하든지, 복음서가 선포하는 예수와는 거의 연관성이 없다. 예수에 대한 충성이 창조주 하나님을 확증하는 성경 증언으로부터 분리된다면 구원은 개인적 차원의 관점으로 축소 정의된다.
  3. 성령의 일신론
    삼위일체의 세번째 위격의 일신론이다. 주요 관심사는 성령에 대한 경험과 은사이다. 하지만 영이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의 영인지 아닌지, 영이 공동체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파송하는 작용을 하는 여부를 분별하는 데는 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기독교 교회에서 성령의 경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분열적이거나 파괴적인 경험이든 하나로 귀착된다.

 

삼위일체론의 의미의 재진술

아우구스티누스는만약 무엇인가를 완전히 파악했다면,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는 완전히 파악할 없는 신비이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 지식의 한계와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부적합한지가 드러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다른 이미지를 탐구해야 한다. 이것은 전통적 이미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의 심층문법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앙의 심층문법이란, 자유롭지만 자유를 사용하여 자신을 남에게 내어주며, 공동체와 상호성과 공유의 삶을 창조하는 경이로운 하나님의 사랑의 문법이다.

 

삼위일체론을 해석하는 필요한 세가지 진술을 추가한다.

1.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삶이 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인격적 삶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표현하며, 죽은 우상과 같지 않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피조물과의 살아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오신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격을 획득하는 것은 영원 속에서 이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살고 사랑하고 계셨다.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존재 안에 이미 운동과 생명, 인격적 관계와 사랑의 교환이 있다. 삼위일체는 사랑하는 인격득 간의 교제다. 삼위일체의위격들 서로 분리된 자율적 자아들로 이해될 없고 관계성 속에서 인격적 정체성을 가진다. “위격들 관계적 실재로서 상호 주체성, 공유된 의식, 신실한 관계성, 사랑의 상호 교환에 의해 정의된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삶의 풍부함과 역동성 안에는 구별성과 타자성이 존재한다.

2.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이해되는 관계성과 협력성보다 훨씬 깊은 교제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확증한다.

삼위일체 신학에서 자주 사용된 가지 유비가 있다. 심리학적 유비와 사회적 유비가 그것이다. 전자는 인격이 자아와는 구별되지만 분리될 없는 활동들로 형성된다는 견해이다. 후자는 인간의 관계적 삶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열쇠이다. 그러나 전자는 지나치게 확대하면 하나님을 고독한 개별자로 축소시키거나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적 관계의 실재를 무시할 위험이 있다.(양태론 이단) 또한 후자는 지나치게 확대하면 하나님을 서로 협력하여 활동하기로 결단한 분리된 개별자들로 간주할 위험이 있다.(삼신론 이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유비를 새롭게 묵상해보면, 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의사회성 증언한다.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상호 간의 심오하고 비분리적인 관계 속에서만 각각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다. 삼위일체적 삶의 형언할 없는 교제는상호내주(mutual in dwelling)” 또는서로의 안에 있는 존재(being in one another)” 표현되어 왔다. 서로 안에 내주하고 서로에게 침투하며 서로를 둘러싸고 하나를 이룬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신학은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관심의 토대를 놓으며, 대화와 합의가 세상과 교회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 구성요소가 것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부인하는 모든 전체주의를 철저하게 의심하며 공공복지를 파괴하는 모든 우상숭배적 개인주의에도 저항하는 힘을 길어낼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삶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며, 사랑은 상처받을 가능성까지도 끌어안는 사랑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은 유례없는 사랑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 때문에, 피조물을 통해, 피조물과 함께 고통당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자유로우며 사랑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상호 간에 자신을 양보하는 사랑의 무궁무진한 역사이기 때문에 상처받기 쉬운 세상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실 있고, 그래서 인간 공동체의 영원한 원천과 활력이 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어주는 사랑을 이해했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삶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예배와 섬김과 실천을 통해 삶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

기독교 신학 전통은 자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입장을 보여왔다. 스콜라신학은 하나님의 속성을 실질적으로 분리된 개의 집합으로 나누는 경향을 보여왔다. 단일성, 무한성, 불변성, 무고통성, 영원성, 자존성 하나님에 대한 부정의 지식과 거룩성, 사랑, 자비, 정의, 인내, 지혜 하나님에 대한 긍정의 지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전개는 성경적으로 볼때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칼바르트는 기독교적 하나님의 속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찾았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분리된 항목이 아니라. 변증법적 (dialectical pairs) 속에서 신적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거룩 분리될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거룩한 은혜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은 순수함이나 무결점이 아니라 은혜로운 거룩이다.

- 삼위일체 하나님은 목적에 있어 항구성 가지는 동시에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새롭고 변화하신다. 자신의 특성과 목적에 있어서 항구적이며 꾸준하고 신실하시다. 성령의 권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게시된 하나님의 은혜는 항구적이며 신뢰할만하지만 아침마다 새로우시기에, 하나님의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은 놀랍고도 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불변하다는 표현보다 정확하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를 받을 수는 있지만 정복당할 수는 없다.(고통에 무감각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삶은 감정에 의해 지배되거나 파괴될 있지만 하나님은 감정에 좌지우지되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유 안에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자유 안에서 우리를 위해 상처를 입으시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으신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 사랑 불가분리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은 전능한 사랑이다. 타자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에 충분한 모든 권능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능한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주권적이고 강요하지 않는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지(omniscience) 무한히 심오한 지혜이며, 은혜로운 인내 함께 행사된다. 하나님의 전지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닌 훨씬 심오한 성경이 칭송하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진 방식으로 역사하며 심지어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의 눈에는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방식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의로운 심판과 인내하는 사랑을 통하여 행사된다.

-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곳에 현존하되 그러나 모든 곳에 자유롭게 현존하신다. 자신이 기뻐하는 대로 신간과 공간과 방식을 선택하여 현존한다.(하나님의 편재성)

-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 교제 안에서의 하나됨이다. 사랑의 교제 안에는 구별은 있으나 분열은 없고, 자기 헌신은 있으나 자기 상실은 없으며, 끊임없는 조화와 평화를 누리는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성 영광스럽다. 하나님은 영속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고 성령의 교제 속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배가 된다.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

기독교 신학에서 이중 예정론은 수많은 오해와 왜곡 속에 논쟁과 곤경을 초래했다. 성경에서 선택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은혜의 하나님임을 알리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맥락에서 선택론은 창조, 화해, 구원과 같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도로 알려진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은혜 안에 시작과 목적을 가짐을 선언하는 것이다. 영원한 교제 가운데 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타자를 자신의 교제 속으로 포함시키기를 은혜 가운데 원하셨음을 확증하는 것이 중심 목적이다.

 

  1. 선택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선택은 하나님이 교제 안에 있는 자신의 삶을 타자와 함께 공유하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를 위하고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정,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권능 안에서 우리에게 오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우선적 의도이다.
  2. 선택에 관한 우리 지식의 기초는 바로 측량할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며 성령과의 교제 속에서 공유된다. “창세전부터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전혀 없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며,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할 없다.
  3. 선택론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지, 고독한 개인들을 구원함도 아니며 특정한 민족과 인종집단을 특권화하는 것도 아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모든 자들이 선택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개인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공동체를 창조하기 원하신다.
  4.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에는 그분의 의로운 심판이 뒤따른다. 그러나 양자는, 전통적 이중 예정론의 제안처럼 개의 평행선 같은 관계는 아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자비가 자유로운 선물이며 하나님이 죄와 불신앙을 심판하신다고 말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은 심각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심판이 필연적으로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11:32) 만약 종국에 은혜의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이들이 있다면, 이는 그들이 창세 전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끈질기게 반대했기 때문이다.(25:34,41) 칼뱅은 선택론을 두려움이나 오만한 방식으로 다루지 말것을 경고했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확신과 신뢰를 주는 교리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인 동시에 버림받은 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선택과 버려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선택론의 내용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목적이 어떤 이는 선택된 자로 구원하고, 어떤 이들은 버려진 자로 정죄한다는 끔찍한 소식이 아니다. 선택의 신비는 세상의 기초가 놓여질 때부터의 하나님의 뜻의 신비로서, 교제 가운데 하나님 자신의 삶을 타자와 공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이르게 하고자 뜻하시는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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