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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신앙생활/신학자료

한국조직신학회 교회론 서평

by jinaou83 2020. 8. 25.


한국조직신학회 [교회론]

칼 바르트, 본회퍼, 폴 틸리히

 

<칼 바르트의 교회론>

 

바르트의 교회론은 우리가 그동안 알던 교회론의 기초이다. 통전적 신학이라는 안전한 자리에서 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품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마음은 편안하지만 그리 도전적이진 않다.

바르트의 모든 신학은 그리스도론에 입각해있다. 그의 교회론도 그리스도론에 따라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에 바르트의 교회론은 사건으로서의 교회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단순히 건물이나 제도가 아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건이 일어나는 그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개념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후에 바르트는 사건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반드시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현존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보이는 공동체인 교회는 교회의 제도와 헌법과 질서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것이다. 이런 교회론의 변화는 그의 그리스도론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그는 처음엔 그리스도의 육체성이 갖는 계시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후에는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껍질로 보는 시각을 중심으로 성경과 교회를 풀어나갔다. 하나님이 그 은폐의 문을 여시고 우리는 만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교회를 사건으로 이해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도 있지만 동일시되지 않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로 존재하실 수 있지만, 교회가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다른 모든 성도들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갖고 있는 성도들의 민주적 사귐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교회가 존재하는 중요한 목적 역시 그리스도론에 입각하여 풀어나간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과제를 가진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희망이고 세상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며, 세상에 봉사하고 세상을 위한 교회로서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바른 지식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처럼 교회가 수많은 뭇매를 맞으며 비판적 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때에, 바르트의 교회론을 통해 교회가 진정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교회의 자기성찰이 필요하겠다. 교회가 이제까지 수많은 사역을 해왔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사역이었는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는지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진정 교회가 성도들의 민주적인 사귐의 공동체였는지 돌아보면 좋겠다.


<본회퍼의 교회론>

 

요즘 나라의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본회퍼의 사상과 이론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하였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본회퍼는 ‘타자, 공동체, 사회, 집단, 세상’ 등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개념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개인의 행위가 중요하다. 본회퍼는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 개인의 윤리적인 책임과 의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 행동하는 믿음과 신학을 강조한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개인의 죄의 개념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와 따로 분리할 수 없다. 개인의 죄는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보편성을 가진다. 개인의 범죄행위가 세대의 죄와 인류의 죄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윤리적 인류 개념으로 발전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택하신 한 사람을 통해 나라와 민족을 움직이신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죄가 확산되었다. 또한 한 사람을 통해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의 죄와 죽음을 끊고 구원으로 이르는 길을 만드셨다. 본회퍼는 이런 개념 속에서 교회를 생각하였다. 개인의 범죄 행위 안에 인류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인류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인류는 그 자체로서 집단인격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 따라서 이런 이중적 성격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역할도 이중적이다. 즉, 위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교회의 교제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믿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만 생각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웃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의 승리를 바라지만, 개 교회주의를 넘어 교회의 승리가 온 세상에 퍼지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대통령이나 되어야 그 영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회퍼의 사상에 따르면 우리 각 사람이 하나 하나 얼마나 중요한 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에 세상에 소외되어 있는 작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하고 소중한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겠다고 하지만 얼마나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는 지 생각해 볼 일이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 예배와 전도와 교육과 친교와 봉사와 선교를 하지만, 정말 그 사역들에 진정성이 있는 지 필자는 이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선교가 아니라 교회의 영광을 위한 선교로 전락해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무감각하고 진정으로 공감할 줄 모르고, 나몰라라하는 태도는 본회퍼의 교회론에 의해 매질을 당할만한 가슴 아픈 현실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좀 더 분명한 태도를 보이면 좋겠다.

회개와 믿음만 있고, 진정한 섬김과 봉사가 결여된 한국교회의 영적상태를 진솔하게 점검하고, 지금부터라도 고통과 아픔으로 눈물 짓는 수많은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면 좋겠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시대에 믿음도 있고 소망도 있으나 진정한 사랑이 없는 오늘날의 교회를 반성하며 다시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애써야겠다.


<폴 틸리히>

 

틸리히 역시 본회퍼만큼이나 궁금한 학자이다. 틸리히는 교회의 기능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보았다. 구성의 기능과 확장의 기능과 건설의 기능이 그것이다. 틸리히는 여기에서 균형을 강조했다. 교회가 전통과 개혁이라는 균형과 진리와 적응이라는 균형과 형식초월과 형식긍정이라는 균형을 통해 교회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극과 극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가 애써야 하며 이런 균형이 깨어지면 교회가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다.

틸리히는 문화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만큼 문화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균형과 소통’을 중요시 하였다. 결국 교회의 좋은 리더십은 얼마만큼 균형있게 대극적인 관계들을 유지하며 소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비단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공동체나 집단이든 ‘균형과 소통’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균형과 소통, 종교와 종교 간의 소통,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균형과 소통, 이외에도 여러 균형과 소통의 문제들이 중요시된다. 각자가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에 급급하여 소통이 부재되어 있는 이 사회 속에서 틸리히의 주장은 매우 힘이 있게 느껴졌다.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다른 이를 배려하고,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공감하며 그들을 돕는 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처럼 여겨진다. 교회가 봉사와 선교를 한다지만, 그 속에서 근본적인 균형과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월호를 비롯하여 밀양 송전탑 문제 등등 억울함을 호소하고 눈물 지으며 고통 속에 소리치는 저들의 목소리를 누가 들어주며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교회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교회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말없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바로 옆에서 혹은 그들보다 앞에 서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같이 소리쳐 주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신학에도 균형과 소통이 필요하다. 믿음만을 강조하지 말고, 행위만을 강조하지 말고, 믿음과 행위의 균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리치는 그들에게 말로만 함께하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틸리히의 사상 중에 무엇보다 성령을 강조한 점이 좋았다. 바르트는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론 중심이라면 틸리히는 그것과 함께 성령론 중심이다. 교회를 영적 공동체로 보았다. 영적 공동체의 본질적 요소에 황홀함과 신앙과 사랑, 통일성과 보편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공동체의 신앙이 파괴되지 않는 통일성과 성, 나이, 인종, 민족, 전통, 성격 등의 다양한 갈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주장함으로서 각기 다른 사람들 사이의 긴장 속에서 영적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공동체 개념은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교회 안과 밖에 모두 적용된다.

직장생활도 해봤고, 교회생활도 해보면서 어디를 가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고 같은 예수님을 믿으며 같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나와 다른 사람과 한 공동체에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 갈등들을 겪으면서 많이 울었던 지난날을 돌아보니 결국 사랑의 부족이었다는 자책만 하게 된다. 틸리히는 진정한 회심이야말로 영적 공동체에 실존적 참여가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체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이다. 올 초, 개인적으로 기차사고를 겪었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극적으로 무사히 살아남았다. 내 인생이 그 후에 달라졌다. 미운 사람이 없어졌다. 모두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회였다. 그 날 이후 난 진정한 회심을 했다고 믿는다. 관계가 어려웠던 사람들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사랑으로 진정한 영적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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