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2007)
1. 서론 : 이 책을 선택한 이유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번째 이유는 수용소 안에서 그 끔찍했던 시간을 지나 온 저자의 살아있는 경험과 그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 지 궁금했다. 이 책을 읽기 몇 달 전, 북한의 독방 감옥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949일 동안 억류 되었다가 돌아오신 임현수 목사님의 간증설교와 책을 읽었던 터라 수용소에서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고 여러가지 면에서 비교해보고 싶었다. 예를 들면 수용소의 환경, 고난을 견뎌내는 원동력, 풀려난 이후의 삶 등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두번째 이유는 로고테라피에 대해 궁금했다. 미술치료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학업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한 학기가 지났다. 많은 이론과 개념들이 홍수처럼 쏟아져내리고 머리와 가슴에 모두 담아내고 흡수 시키기엔 나의 능력과 지혜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는 우연히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세번째 이유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소제목 때문이다. 어린시절 힘든 고난의 시간들 속에서도 꿈을 잃지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희망을 품었던 나의 삶을 유능한 프랭클 박사가 대변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이 책을 집어 들었다.
2. 본론 : 요약
(1)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이 책은 프랭클 박사가 로고테라피를 창안하는 계기가 되었던 수용소 안에서의 자신의 체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유태인이며, 원래 의학박사이며 철학박사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 잔인한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과 만나게 된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모든 가치가 파괴되고, 추위와 굶주림, 잔혹함, 자비없는 노동과 내일을 알 수 없는 공포만이 가득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는 어떻게 삶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었을까?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이고, 세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처음엔 망상과 환상에 사로잡힌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언젠가는 수용소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며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잔혹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 환상은 무너지고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두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는 ‘무감각’이다.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혐오감과 공포, 동정심과 같은 감정을 더이상 느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가거나 이미 죽은 것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불확실한 현실과 계속되는 긴장상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하다보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는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행한다. 빵 한조각에 울고 웃는 수감자들의 원시적인 생활은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수감자들의 무감각은 굶주림과 수면부족, 초조함이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세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는 도덕적, 정신적 결함이다.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이 자유를 마치 특허처럼 잔인하게 사용하여 이제는 억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쪽이 되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통함과 환멸을 느낀다. 자신들이 겪은 시련이 대체 무엇 때문이었는지 비통함을 느끼며, 자유를 얻은 후에도 여전히 시련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 환멸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수감자들이 있는 반면 소수이지만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수감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자유가 없는 삶이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존재했다. 프랭클 박사는 이런 체험을 통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겪는 시련은 가치있는 것이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그들의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이다. 인간의 삶에서 창조적인 일과 즐거운 일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련에도 의미가 있으며 죽음에도 의미가 있다. 사람이 자신의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을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 속에서 수감자들은 미래도 없고 삶의 목표도 없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결국 죽음을 불러 일으킨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며, 누구든지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가진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프랭클 박사와 뜻을 함께 한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며 때에 따라 다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면 그것을 짊어지고 이겨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 살아야 하는 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2)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는 한마디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한다.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인간을 그저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이드, 자아, 초자아를 절충시키거나 혹은 사회와 환경에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로고테라피의 주된 관심사는 어떤 의미를 성취하는 데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정신분석과 다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실존적 공허를 느끼며 자신의 삶 전체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통 받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을 하거나, 돈이나 권력 혹은 성적 탐닉으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로고테라피는 이렇게 실존적 좌절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다양한 정신질환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만이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이런의미에서 로고테라피는 책임감을 강조한다. 환자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둘째,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여기에서 두번째 방법은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을 체험하거나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는 것,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랑은 힘이 있다.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프랭클 박사가 수용소 안에서 아내를 떠올리며 힘들고 외로운 상황을 이겨냈었는데, 그때 그는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고 믿었다.
세번째 방법은 시련을 통해서다. 물론 삶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시련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피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있는 행동이다. 피할 수 없는 시련이라면 시련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로고테라피에서 개발한 역설의도 기법은 마음 속의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이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다.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대신 그 반대되는 소망이 들어가도록 해서 자기 병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역설의도 기법은 발병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치료에 효과적이다.
(3) 비극 속에서의 낙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세 가지 비극적인 요소 즉 고통, 죄, 죽음이라는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낙관적일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인간은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 인간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잠재력,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잠재력,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내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집단적 신경 증후군은 실존적 공허감,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인해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으로 나타난다.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의미와 목적을 알았다면 이런 모든 충동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이것이 바로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다.
3. 결론 : 느낀점
(1) 신앙인으로서, 목사로서…
나는 10대 청소년기에 하나님을 만나 지금의 목사가 되었다. 모태신앙도 아니었으며, 좋은 가정 환경에서 자라지도 못했다.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번 쯤은 가질 법한 반항의 시기도 있었고, 안정적이지 못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 질풍 노도의 시기에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제2의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교회를 통해, 좋은 스승님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사용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가정 환경은 어려웠고, 내가 놓여진 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그것에 대처하는 나의 마음이 달라졌을 뿐이다. 프랭클 박사가 말한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 바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마법같은 치유 방법이었다. 좋은 목사님과 전도사님, 선생님들을 통해 로고테라피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프랭클 박사의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프랭클 박사의 이론은 인간의 의지와 태도에 모든 게 달려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내가 신대원에 재학 중일 때 ‘달팽이 도보여행’이라는 노숙자 재활프로그램에 동행한 적이 있다. 노숙자는 의지박약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없이 함께 했었는데, 일주일간 동행하면서 내 생각이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중에는 자기합리화를 위해 자신의 어려운 환경을 더 강조하고 강조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은 단 한번의 시련으로 거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첫번째 시련 앞에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와 태도를 가지고 버텨보지만 번번히 무너지고, 더 큰 시련이 찾아오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결국은 포기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노숙인을 의지박약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아무도 그들에게 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느냐고 감히 따져 물을 수 없다. 시련 속에서 자신의 태도를 고치고 삶의 의지를 갖는 것 조차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꼭 강조하고 싶다. 내가 비극 속에서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은 온전히 나의 의지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 덕분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목사로서 선한 양심적 고백임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2) 코로나19 pandemic 상황에서…
영화같은 일들이 계속되는 팬데믹 상황 속에서 코로나 블루, 블랙, 레드까지 코로나19로 인한 우울증세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나도 코로나19로 인해 원치 않는 독박육아로 매일 매일 전쟁 속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분노하고, 소리를 지르며,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나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게 된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전염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내일을 준비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낸다. 놓여진 상황과 시련의 강도는 다를 수 있지만 팬데믹 상황에서 우울을 경험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반드시 전해주고 싶다. 지금 이 어려운 상황을 우리가 하루 아침에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이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말이다.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한정적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는 선물같은 하루이다. 어제 벗어 놓은 신발을 오늘 다시 신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감사의 제목이다. 얼마든지 우리의 하루를 멋지게 장식할 수 있다. 지금도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위로하며 모두가 건강하게 이 시기를 함께 이겨내기를 응원하고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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